터번을 두른 캐나다 수상 ?
이번 선거기간동안 많은 지인들에게 자그밋 싱 NDP 당의 대표가 ‘터번을 두르고 있어서 비호감이다’ 라거나 ‘터번을 두른 사람이 캐나다의 수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인도인의 전통을 따르는 자가 캐나다의 수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캐나다의 수상은 캐나다의 문화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거나 ‘경험상 인도인들이 참으로 싫다 따라서 난 터번을 두른 자그밋이 지도자로 있는 당이 싫다’ 등의 참으로 감정적인 편견에 마주해야 할 일이 많았다.
자그밋 리더의 터번을 두고 혐오성 발언을 하는 사람들의 감정적 편견에 접할때 나는 백인들이 Covid 19이 중국우한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아시안계들을 모두 혐오하는 일이 참으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시안계 혐오와 관련된 폭력등에 대해 캐나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아시안계 혐오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우리는 그 보호를 받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발생한 사스(중증급성호흡증후군, Sars)당시에도 인종 차별 현상이 일어났었다. 당시 일부 지역에서는 최근 중국을 다녀온 가족원이 있는 가정의 아이들을 등교 금지시켜야 한다는 청원이 시작됐었고, 중국계 캐나다인 위원회 저스틴 콩 회장은 BBC에 “사스 당시 수입과 일자리가 줄면서 생계가 막막해진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와 일터에서 오명을 써야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런 우려 속에 장 크레티앵 전 캐나다 총리는 아시아 업소를 피할 이유가 없다면서 일부러 토론토 차이나타운에 들러 점심식사를 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인종차별의 보호를 받고 있는 우리가 역으로 그 누군가에 대한 인종 차별및 종교차별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태복음 18:23-35장의 빚진자의 비유 성서말씀이 떠올랐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중국에서 코비드가 발생했다는 사실 때문에 아시안계 인종들이 모두 혐오의 대상이 되거나 차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내가 한 남자와 연애를 하다가 실연을 했다고 해서 모든 남자들을 혐오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닌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경우를 두고 우리는 개별적 특수한 경험에 근거해서 보편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1933년 집권한 나치의 독재에 대해서 독일교회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영혼구원을 위해 예수를 보내 주셨듯이 지금 현재 독일의 “경제적, 사회적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히틀러를 보내주었다.”고 주장했었다. 이것은 히틀러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이였고, 단지 히틀러를 우상으로 치부하여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같은 경우 당시의 독일 교회 현상에서 나타난 일시적 사례를 가지고 기독교 일반을 다 비난해서는 안된다. 또한 더불어 일시적 교회 현상과 기독교의 본질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된다. 일시적 역사적 현상속에서의 교회 현상과 기독교의 본질은 다르다는 것을 구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본질과 현상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잠시 본회퍼라는 신학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당시 본회퍼라는 신학자는 나치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교회를 향해 히틀러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고 경고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었고, 결국 1943년 4월 체포되어 2년간 수용소 있다가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Flossenbürg concentration camp)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나치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당시 독일교회에서는 본회퍼처럼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나치에 반대하는 신학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고백교회를 결성하여 그들의 양심을 실천했었다.
인도인들에 대한 개별적 일시적 경험을 근거로 인도인 모두를 혐오해서는 안되고 인도인들에게서 보여지는 일부 현상으로 전혀 다른 행태를 가질 수 있는 인도인들의 본질까지 왜곡해서는 안된다. 독일인이 유태를 핍박했던 역사적 사실 그리고 나찌의 역사때문에 독일인 모두가 나쁘다고 보아서도 안되고 독일의 교회때문에 기독교의 본질 자체를 비난해서도 안되면 독일인 가운데 본회퍼같은 신학자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그밋 당수가 터번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감성적인 반감을 갖는 것은 이성적인 태도가 아니며 인도인들과의 안좋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자그밋 당수에 적용하는 것도 옳지 않다. 자그밋을 비판하려고 한다면 그가 내걸고 있는 정치 공약의 어떠한 점이 문제인지를 지적하는 것이 올바른 지적이 될 것이다. 또는 그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도덕적 문제를 야기했다면 그런 것은 정당히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나는 터번을 보고 맹목적인 편견과 반감에 직면하는 사람들의 견해속에서 식민주의하에서 교육받은 백인중심의 문화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식민주의 정신의 잔재를 보게되었다. 백인중심의 의복과 의례를 당연히 여기고 그 어떤 다른 종교적 전통을 따르는 의복과 의례등에 대해서는 맹목적 반감을 갖게되는 현상은 다름아닌 슬픈 식민주의 정신의 잔재가 아닐까?
나는 원주민을 죽이고 그들의 땅을 빼았고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미국의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이 흑인 대통령 오바마을 탄생시켰을 때 저것이 바로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었던 힘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즉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신대륙 개척자들의 자세, 자유와 민주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캐나다 공식 야당의 당수 자그밋이 터번을 두른 시크교도라는 사실, 2015년 자유당의 져스틴 트뤼도 총리가 새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터번을 두른 하지트 싱 사잔(44) 국방 장관을 발탁한 역사등은 대표적 다민족 국가가 된 캐나다의 자랑스런 역사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하간 터번을 쓴 인도인이 캐나다 최초로 연방정부 공식 야당의 대표로 취임했을때 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을떄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감격에 마지 않았었다. 유색인종이 당의 리더가 되어도 감격인데 터번을 쓰고 있는 그는 내겐 더욱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일본의 식민지 경험의 역사를 배운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감동이 왔던 것 같다. 일본 식민지 점령 하에서 일본은 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고 했었다. 마찬가지로 캐나다를 대표하는 영국인들은 한때 인도를 식민지화했던 국가이다. 영국이 인도에 대해 취한 정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종차별 정책이었다. 서구의 백인 우월주의에 기초한 영국의 인종차별 정책은 열차, 대합실, 공원, 호텔, 수영장, 클럽등에 유럽인 정용 구역을 따로 정해 인도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금하는 형태로 나타났었다. 영국의 지배 하에서, 인도에서는 1000년 동안에 일어났던 것보다 더 많은 기근이 단지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났었다. “..150년에 걸쳐 영국에 의한 명백히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인도 말살에 대해 나는 놀라고 분개한다; 나는 역사상 최대의 범죄에 맞부딪혔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라고 윌리엄 듀란트는 말한다.
이러한 식민지하에 있었던 국가의 후예가 제국주의 지배자 영국인들이 세운 캐나다에서 연방 공식 정당의 대표가 되었다는 사실, 더나아가 제국주의자들이 말살하고자 했던 그들의 종교를 나타내는 터번을 두르고 당당히 연방정부 의회에 앉았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 체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나는 눈물나게 감격스러웠다.
끝으로 지적하고 싶은것은 터번은 인도인 모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시크 교도의 특징이다. 터번에 대한 차별적 혐오는 인종적 차별 뿐 아니라 타 종교에 대한 차별이고 혐오이다. 특별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라는 고린도전서 13:13의 말씀을 기억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타인의 종교적 신념을 표현하는 터번을 두고 그가 수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식의 차별적 견해를 표명해서는 더욱 안된다고 생각한다.
터번에 대한 맹목적 편견으로 인종 차별적 종교 차별적 입장을 표명하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다. 같은 독일인일지라도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찌와 같은 독일인이 있고 본회퍼와 같은 전혀 다른 본질의 독일인이 있고 아시안계를 혐오하는 백인이 있는가하면 인종차별과 종교차별로부터 아시안을 보호하고자 하는 백인들이 있다. 자그밋 당수의 자도자적 자질과 성품에 대해 함부로 속단하지 말고 그의 정치적 행보와 삶을 편견없는 진중한 자세로 판단해야 한다. 특별히 인도에는 세기의 지도자 간디와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 또한 기억해 보기를 바란다.
연방정부에서 NDP당이 다수당이 되어 정부 구성에 성공한 사례는 아직 없다. 이번에도 NDP 는 단지 25의석을 확보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언젠가 NDP 당이 다수당이 되어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면 나는 터번을 두른 리더가 캐나다의 수상이 되어 연설하는 그날을 그려보고 싶다. 그것은 미국이 노예로 부리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셨던 것과 같이 , 지배당했던 자가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드라마틱한 역사의 반전으로, 지배자의 입장에서도 겸손할것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며, 어떠한 절망적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아도 될 아름다운 희망의 역사적 메세지가 될 것이다.
https://www.yna.co.kr/view/AKR20151106136900009
https://ko.wikipedia.org/wiki/%EB%94%94%ED%8A%B8%EB%A6%AC%ED%9E%88_%EB%B3%B8%ED%9A%8C%ED%8D%BC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saranmul&logNo=220629646570)
https://www.bbc.com/korean/news-51306810